"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요 17:21)
그분의 위대한 대제사장적인 기도에서 두 차례, 우리 주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 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11절, 21~23절) 이 하나 됨을 위한 기도는 에큐메니칼 운동 (모든 기독교계의 거대한 통합을 꾀하는 운동)의 성경적인 근거로 지적되어 왔습니다. 불행히도 이 통합적인 연합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포기하거나 재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말콤 머거리지의 표현대로, "우리 시대의 주목할 역설 가운데 하나는, 주위에 통합적인 요소가 없을 때에 바로 그러한 때에 에큐메니칼 운동이 성공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여러 종교 단체들은, 단지, 조금밖에 믿지 않으므로, 따라서 자연 조금밖에 다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연합하기가 수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는 다른 많은 부분에 있어서는 의견이 일치되지 않으면서도)"
이것이 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고 계셨던 그런 연합일까요?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생각하신 연합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심 것을 믿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위에서 말한 외형적인 동맹이 과연 이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는 극히 의문스럽습니다.
주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분의 심중에 있는 연합을 정의 내리셨습니다. 아울러 그분은 "...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누리시는 연합을 누릴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 두 분의 공통적인 신성을 가리키는 연합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연합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주 예수님은 공통저인 도덕적인 유사함에 오래 참음, 절제, 온유, 희락, 관용 등의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로날드 사이더는 "궁핍한 시대에 사는 풍요한 그리스도인들"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신 연합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필요에 따라서 서로 물건을 통용할 때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코이노니아" 혹은 공동사회의 정신을 소유했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의 아름다운 연합이 온 세상에 알려진 세상으로 하여금 그분께서 아버지로부터 오신 것을 믿게 해 달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적어도 한 번은 응답되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삶의 비범한 질(質)이 한테 모아져 사도들의 메시지에 능력을 더해주었습니다. (행 2:45~47, 4:32~34)"
그러한 연합은 오늘날 세상에 깊은 감명을 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 에수님의 생명을 발하는 데 있어 연합된 증거를 드러낼 때, 믿지 않는 자들은 자신들의 죄악 됨을 깨닫고 생수를 갈망할 것입니다. 오늘날 시대의 비극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지 않는 이웃과 별 차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는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받게 할 만한 흡인력을 거의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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