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이 완성될 무렵 이스라엘은 두 부류로 남아 있었습니다.
국민의 상당수가 페르시아 제국 내에서 포로라기보다는 식민의 상태로 흩어져 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유대에 남아있던 사라들은 대부분이 다윗 족속의 왕손이었던 스룹바벨과 함께했던 유다 지파였거나 고레스왕이나 그 후계자들이 허락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단 5:18, 스 6:16~22) 그들은 돌아와서 성전 예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에 남아있던 사람들의 정치적, 종교적 역사에 대해 관심을 많이 기울일 것입니다.
1. 정치적으로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의 운명은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이방민족의 역사와 긴밀한 연관이 있습니다.
1) 페르시아 제국은 구약 성경이 완성된 후에도 백 년 간이나 계속되었으며 수리아 총독의 통치하에서 유대인의 자치와 종교 행사를 허락했습니다. 이 기간에 사마리아는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와는 달리 옛날부터 시행해 오던 우상 종교를 더욱 발전시켜 신전을 건축했습니다.
2) 기원전 334년 알렉산더대제가 통치하는 헬라제국의 수중에 들자 정복자인 알렉산더는 유대인에게 관대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에 유대인은 수리아와 애굽의 침략의 틈바구니에 끼어, 처음에는 수리아의 통치하에 있다가 후에는 프톨레미 왕조의 애굽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주전 323~198년) 상당수의 유대인들이 애굽에 살게 되었고 70인 역이라 불리는(Septuagint translation) 알렉산드리아 사본이 생겼습니다. (기원전 285년)
주전 198년에 유대는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에게 정복되었고 이때에 유대를 다섯 구역으로 분할하여 통치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드라고니아와 베뢰아 지방이었습니다.
초기에 유대인들에게 대제사장의 통치 아래 유대 법률대로 생활하도록 허용했고 자치 의회도 구성했습니다. 기원전 171년 안티오쿠스(에피파네스) 4세(단 8장 9절의 작은 뿔)는 성전 예배와 제사장 제도를 말살하고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하고 성전을 모독하고 수많은 유대인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기원전 168년에 안티오쿠스는 성전의 제단 위에 숫돼지를 제물로 드리고 주피터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곧 다니엘 8장 13절의 "망하게 하는 죄악에 대한 일"입니다. 성전에서의 예배는 금지되었고 백성은 돼지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범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안티오쿠스의 박해는 마침내 역사상 유명한 마카비의 폭동을 유발했습니다. 마카비의 맏아들인 마타디아가 경건한 제사장으로서 혁명을 시작하자 유대인들은 자유를 쟁취하고 성전에서의 예배를 회복하고자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마타디아의 아들인 유다는 마카비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로서 '망치'라 불렀습니다. 유다는 사 형제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중에서도 시몬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165년에 유다는 예루살렘을 재탈환하여 성결하게 하고 성전을 다시 봉헌했는데 이를 유대인들은 수전절로 기념합니다. 유다가 전사하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을 통하여 계승되었습니다. 요나단은 민중의 대표이자 제사장의 권위를 겸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143년)
요나단의 영도하에서 그의 동생인 시몬, 그의 조카인 요한 히라카누스(John Hyracanus)등 하스몬가(Hasmonean)의 통치체제는 로마가 승인함으로써 확립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와 마카비의 사적은 외경(外經) 마카비 1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후에 유대에는 내란이 있었는데 기원전 63년에 끝났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에 의하여 유다와 예루살렘은 정복되었고 폼페이는 하스몬가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히라카누스에게 명복상의 권위만 주고 이두메아 사람 안티파테르에게 실권을 장악하게 하였는데 기원전 47년에는 줄리어스 씨저에 의해 그가 유대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안티파테르는 그의 아들인 헤롯을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했습니다.
줄리어스 씨저가 암살당한 후에 유대인의 혼란이 야기되자 헤롯은 로마로 피신했습니다. 기원전 40년에 그는 로마에게 유대 왕으로 임명을 받아 유대에 돌아와서 히라카누스의 손녀인 마리안네(Mariane)와 결혼하여(기원전 38년) 민중을 위무(慰撫)하려 하였으며 그의 동생인 마카비 아리스토 불루스(Maccabean Aristo Bulus) 3세를 대제상으로 임명했습니다. 헤롯왕은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통치했습니다.
2. 종교적으로
말라기에서 주님이 오시기까지 400년이란 긴 세월 동안에 예배의식이나 제사장 직분이나 백성의 규례는 정치사에서 보아온 과정을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이 성장하고 활성화했다는 점입니다.
1) 포로 중에 유대인들은 우상 숭배의 경향에서 돌이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포로생활 중에 성전과 제사장 직분이 모독을 당하자, 옛날 선지자들을 통하여 교훈을 받은 역적, 도덕적 이상을 고수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성전 예배가 회복된 후에도 유대인들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들이 전해준 대로 믿음을 지켜나가려는 노력과 내분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2) 선진들의 믿음을 지켜나가려는 수단으로 회당이 생겨났습니다.
말라기 이후에는 성경의 질서가 국민생활의 규범으로 통일되지도 못했고 세분해서 발전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회당의 연원은 포로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성전도 의식도 없었던 유대인들은 안식일마다 기도하기 위해서 만났습니다. 이러한 기회에 그들은 성경을 읽으며 무질서에 대하여 절제하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규범을 제시했습니다. 처음에는 미미한 존재였으나, 회당은 기독교 시대가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이 처해 있던 상황적 필요에 따라 팽창해 갔습니다. 이 회당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의 활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을 보존하는 데 결정적 의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회당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의 영적 생명이 양육을 받게 된 것입니다. (롬 9:6)
3) 아울러 이 기간에 많은 유전과 해설과 주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미시나(Mishna), 게마라(Gemara), 미드라쉼(Midrashim), 카발라(Kabbala)로 알려진 여러 견해는 율법 이상으로 과중한 의무를 지우기도 했고, 정통적 해석이라는 구실로 율법의 참뜻을 왜곡시키기도 했습니다.
4) 이 시기에 복음서에 자주 언급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출현했습니다. (마 3:7)
헤롯당은 종교적 분파이기보다는 하나의 정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의 통치하에서 이두메아 사람인 헤롯의 통치를 아울러 받으면서 심한 종교적 논쟁으로 분열되고 세부적인 종교의식을 지키던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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