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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신앙 서적/성령의 내주, 그리고 충만

언제 성령님을 받는가? (Chapter 1)

by 김복음 2022.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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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거듭난 신자라면 자신이 성령님을 받은 어느 시점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답하려면, 우리는 에베소서 1장 13~14절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 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하나님은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처음 만났을 당시, 신자들이었지만 아직 성령님을 받지 못한 제자들의 무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믿을 때에 성령님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그들은 나중에 사도 바울이 썼던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믿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가 됩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질문을 해보면, 많은 크리스천들이 마치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신 사실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처럼 매우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그처럼 결함이 있고, 또 그처럼 불완전한 복음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기독교계가 참된 기독교의 영광스러움과 단순성에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복음과 복음의 핵심

 우리는 과연 에베소서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복음"이 정말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고전 15:1~8) 몇 마디 말로써,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핵심을 믿을 때, 사도 바울은 그들이 진짜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복음의 핵심 1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 (고전 15:3)

복음의 핵심 2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고전 15:4)

 

따라서 구원의 복음은 이처럼 두 가지 위대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셨다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증명해 줍니다. 두 번째, 그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만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고, 지극히 높임을 받으시고 또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만족하심에 대한 증거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따르면 베드로를 포함하여 다른 사도들과 많은 증인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보았습니다. 바울 역시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바울은 "맨 나중에 만삭 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8)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구원의 복음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것을 아직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믿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믿었는가에 대한 질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1~6절에는 이에 대한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묻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런 질문을 하게 했는지에 대해선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답으로 보아 바울이 그렇게 질문했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그것이 그들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아느냐?"라고 물었고, 그들은 "요한의 세례니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우리들은 그다음으로 한 바울의 대답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행 19:4)

 

 세례 요한은 그들에게 완성된 구속 역사의 복음을 증거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은 구원의 복음에 관한 한 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다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할 수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어진 구속의 복음을 선포할 수는 없었습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십자가 구속은 요한이 목 베임을 당한 후에야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생전에는 구속이 약속이었을 뿐,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의 증거는 참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단지 구원의 대한 소망을 줄 뿐이었습니다.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현재적으로 소유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구속을 현재적으로 소유하도록 해주는 것, 바로 그것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다음 예화를 통해서 이 차이점을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한 여왕이 있습니다. 그 여왕은 자신을 오래도록 섬긴 한 늙은 시녀가 심각한 재정적 손해를 계속 당해 경제적인 어려움 가운데 있었고, 게다가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렸는데 며칠 내로 그 돈을 모두 갚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왕 폐하는 자신이 그 시녀의 채권자를 직접 방문해, 그 빚을 다 갚아 주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그 늙은 시녀에게 보냈습니다.

 

 바로 그다음 날, 그 도시의 대로를 따라 여왕이 행차하게 되었고, 그 시녀의 친구는 특별한 마차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건 여왕 폐하의 마차가 아냐?"하고 물었습니다. 그 시녀는 "물론이지!"하고 기쁜 목소리로 외치며, "그런데 왜 여왕께서  행차하셨는지 알 것 같아."라고 말했습니다.

 

 그날 저녁에 시녀의 집을 방문해서, 한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이 사실인가요?"

 "아뇨,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왕 폐하께서 당신의 빚을 다 갚아주겠다는 편지를 쓰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왕 폐하께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 그 일을 다 완료했다는 소식을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걸요."

 "그러면 당신은 소망만 가지고 있을 뿐인데, 그렇게 자기고 있는 소망은 무슨 유익이 있나요?"

 "무슨 유익이 있냐고요? 여왕 폐하의 말씀이 무게가 있는 만큼 유익이 있지요. 또한 그분이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능력만큼요. 사실 오늘 그에 대한 소망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력했다고요. 왜냐하면 여왕 폐하께서 이미 이 도시에 오셨잖아요! 저는 여왕 폐하께서 친히 거리에까지 행차를 나오신 것을 보고, 아직 부채가 탕감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소망하면서, 여왕 폐하의 자비로운 약속은 이미 반은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몸 둘 바를 모르고 있는 걸요."

 이쯤에서 대화를 마치고, 다음날 다시 방문했습니다.

 

 "아직도 당신은 여왕 폐하의 약속을 믿고, 여전히 소망 안에서 기뻐하고 있나요?"

 "아뇨, 그 둘 다 아니에요."

 "그러면 결국 여왕 폐하께서 당신을 실망시켰군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어제처럼 여왕 폐하의 약속을 받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참으로 즐거워하고 있답니다. 여왕 폐하께서는 제가 기대했던 대로 직접 사채업자들에게 찾아가서 해결해주셨고, 그 사채업자들은 빚이 완전히 해결되었음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제게 보내주었습니다. 게다가 여왕 폐하의 시종이 이 기쁜 소식을 오늘 아침에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이상 소망만 하고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지요."

 어제 희망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여왕 폐하께 불명 예를 끼쳐드리는 것이 될 터이고, 오늘마저도 그저 소망만 하고 있다면 그 역시 불명예를 끼쳐드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실 터이니 이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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