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육체 외에 혹은 너머에 있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동등하게, 그리고 함께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화평이신 그리스도는 이 둘로 하나를 만드셨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으며,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고,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셨으며,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시키셨습니다. 그 결과 이 둘로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셨는데, 이 "하나의 몸"을 이루게 하신 결과가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율법은 육신 속에 무언가 선한 것이 잇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아보고자 주어진 것이었고, 육신에게서 나오는 선한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열매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오셨고, 육신에게서 아무 선한 것도 기대하지 않으셨으며 다만 속량의 역사를 하실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육신의 모양으로, 육신의 대표로 오셔서, 그 저주받은 나무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롬 8:3~4)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교리 가운데 육신의 문제를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을 제거하신 것을 보았을 때, 과연 바울은 다시 육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완전히 파손된 배로 보았습니다. 육신은 완전히 바도 속으로 가라앉아 맨 밑바닥에 영면된 상태에 있습니다. 비록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 논 앞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더 이상 육신 가운데 있지 않았고 다만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새 세상으로 완전히 이적되었습니다. 그 새 세상이란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과 더불어 새로운 피조물 상태로 머무는 곳이며,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한 곳입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육신과의 관계를 끝냈다면, 그는 율법과의 관계도 끝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둘, 즉 육신과 율법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둘의 관계를 로마서 7장에서 옛 남편과 아내로 설명했습니다.
율법은, 그 구조와 강제성과 계명들과 더불어 사람을 옭아매는 밧줄이자, 또한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얽혀있는 그물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율법이 방향타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결국 율법을 난파선처럼 여기고 버렸습니다. 만일 그가 배를 버렸다면, 모든 필요한 것이 준비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육체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세상에 대하여 못 박혔다면, 마찬가지로 세상도 자신에 대하여 못 박힌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포기해 보린 육체가 가진 힘이 무엇이었는지를 관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거룩한 하나님의 역사에) 육체가 기여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만 아니라, 육체는 아무것도 보태거나,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육체의 영향에서 벗어났다거나 혹은 육체를 벗어버렸다고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확신했고, 믿음이 하늘에서 끌어오는 충만한 능력을 의지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육신을 정죄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에 대한 심판을 감당하셨고, 신자는 은혜로 말미암아 육신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는 존재로 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자는 이미 정죄받은 육신을 따라서 무슨 행위를 하는 사림이 아닙니다. 육신은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속에 "죄"가 거하고 있습니다. (롬 7, 8장)
육신은 자신만의 종고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육신에 속한 할례 등을 찌끼와 거름더미로 여겼습니다. 육체를 묶고 있는 율법적인 고리와 그 두려움을 벗어버렸습니다. 다만 믿음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안에서만 발견되고자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참조)
육체는 자신만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상은 그 황태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지혜를 가진 자, 세상 선비, 변론가 등입니다. (고전 1:20)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미련하게 만드셨다고 말하면서, 성령님만이 찾아낼 수 있고 또 계시하실 수 있는 지혜, 곧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던" 지혜만을 갈망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2장)
육체는 언변의 탁월함을 포함해서 말씀 사역에 활용할 수 있는 다른 도구들을 가지고 있나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것들 가운데 어느 것도 사용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령의 사역자로서, 성령만을 의지하는 사역자가 되고자 애를 썼습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으라.) 따라서 바울은 어찌하든지 육신으로부터 도망칠 뿐만 아니라, 육신의 자랑거리들과 육신에 호소하고 싶어 하는 모든 욕망을 끊어버렸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육체의 지혜를 살려내고 또 육체의 능력으로 사역을 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바울이 고린도에서 싸워야 했던 싸움이었습니다.
육체의 종교를 살려내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조금도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육신에 있지 않았고, 다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분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성령 안에 있었고, 또한 새로운 피조물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들의 피를 통해서 자신을 의롭다고 해주시는 칭의를 소유하고 있었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개인적인 은혜를 누리면서 또한 사역의 능력을 얻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오로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만 얻을 수 있는 신령한 복입니다. 게다가 이처럼 육신을 포기해 버릴 수 있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믿음의 행위는, 즉 육신을 정죄하고, 육신의 종교와 육신의 자질, 그리고 육신에 속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은 육체의 욕망과 육체의 유혹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앞으로 육신이 영혼을 유혹하러 일어날 때, 우리 영혼은 우리 자신이 이미 육신과는 관계가 끝난 사람임을 기억함으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동일한 믿음의 행위는 복음이 가진 덕성 가운데 행할 수 있는 능력으로 우리에게 적용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형제 속에 있는 육신성을 보면서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전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데 익숙해져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언가 자기 삶 속에서 버리고 포기해야 할 것이 있는 상태에 있을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판단하는데 익숙해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덕성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덕성을 시험하는 계측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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