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장래에 대해서 분별 있게 생각하려면 크게 세 가지의 지침 원리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 하나님께 대한 의무
2. 이웃에 대한 빛
3. 최상의 이익
이 세 가지 책임을 이행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자기는 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1. 하나님
먼저 하나님! 하나님께서 단지 우리의 창조자이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영원한 의뢰와 쇠하지 아니하는 섬김을 받으실 만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위대하신 창조자께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는 이 사실이 우리로 하여금 회피할 수 없게 합니다.
우리 각인은 다음과 같은 영원한 사실에 대해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여야 합니다.
(1) 하나님은 크신 자비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2) 주 예수님은 나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친히 더럽고 부끄러운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3) 주님은 나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고난을 당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4) 죽으신 분은 단순히 사람이 아니고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5) 내가 원수 되었을 때 그분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6) 그분이 나의 죗값을 지불하시기 위하여 당하신 고난은 너무나 커서 사람의 마음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7) 그분은 나를 죄의 노예시장에서 피 흘려 사실만큼 나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8) 주님은 나의 왕, 나의 주, 나의 주인이 되시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쉽게 상투적인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귀한 경우에 그 사실들의 영화로운 빛이 우리의 영혼에 비칠 때 우리는 완전히 압도되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나를 위해 그분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나를 위해 그분께서 이렇게 하셨으니
어떻게 나의 가장 좋은 것을 그분께 아끼랴!
어떻게 온전히 그분을 위해 살지 않으랴!
만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나를 사신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더 이상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께 속하였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어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고후 5:14~15)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를 위하여!
C.T. 스탓은 이 밖에 다른 결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님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구속이란, 값을 치르고 되찾아 오는 것을 뜻합니다. 고로 내가 그분께 속했다면 나는 내 소유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있는 훔친 자가 되거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거나 해야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르자 그분께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이삭 왓츠는 이 놀라운 이치를 흔히 부르긴 하나 별로 실행되고 있지 않은 찬송 시에 나타냈습니다.
자연계의 전부가 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주님께 드리기에는 너무 작은 것.
너무나 놀라운 사랑이, 너무나 거룩한 사랑이,
내 영혼, 내 생명, 내 전부를 요구하신다.
진젠돌프 백장은 말했습니다.
"내가 만일 나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주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나는 주님께 합당치 않은 자일 것이다."
그리고 우간다의 필킹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만일 그분이 왕이시라면, 그는 모든 것에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몇 해 전에 T. E. 윌슨이 앙골라에 사는 주민들을 상대로 집회를 하고 있을 때 한 건강한 사나이가 청중들 사이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한 소년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나이가 움직일 때마다 그 소년이 공포로 움찔움찔했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그는 곧 그 소년이 그 사나이의 노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윌슨은 그 소년을 사려고 흥정을 시작했습니다. 그 주인은 값을 올리기 위해 입씨름을 했습니다. 값이 만족스럽게 타결되자 주인은 마침내 그 소년을 팔았습니다.
윌슨은 그 노예 소년을 집으로 데리고 올 때 그 소년이 전주인에게와 마찬가지로 자기에게도 두려워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다다랐을 때 그는 그 소년과 함께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오늘 내가 너를 샀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나의 소유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너는 자유다.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너는 정글로 되돌아가 네 민족과 더불어 거기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여기 내 집에 머물러 우리 가족이 되어 함께 살 수도 있다."
소년은 윌슨의 말이 참말인 것을 깨닫자, 곧 울 것 같은 눈으로 그 선교사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윌슨 씨, 저는 영원히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그가 이 밖에 무슨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주 예수님,
저는 영원히 주님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저의 손, 저의 발, 저의 음성, 저의 지력(知力),
이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주님은 저를 위해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런고로 저는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로 우리는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드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롬 12:1, 2)
2. 이웃
우리에게는 두 번째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의무입니다. 기독교는 헬라인과 야만인에게, 지혜 있는 자와 지혜 없는 자에게 공히 무거운 빚을 졌다는 생각으로 수고합니다. (롬 1:14) 기독교는 구령에 대한 열정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외치는 신비한 의무감에 이끌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건전한 젊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의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이웃은 멸망해 가고 있습니다.
하루에 수십 만의 사람들이 죄와 멸망으로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한 채 한 사람 한 사람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2) 비길 데 없는 하늘나라의 즐거움이 구원 얻은 성도들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리스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는 지옥의 슬픔이 그들의 영원한 몫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모름지기 조용히 앉아 한 시간 동안 지옥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그 영원한, 그 후회, 그 어둠, 그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머지않아 거기에 갈 친척과 친구들과 이웃들, 그리고 도처의 모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다시는 명목뿐인, 판에 박힌, 자기만족에 빠진 생활을 하지 않을 정도로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만약 복음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땅끝까지 선포되어야 합니다.
암의 치료법을 알고서 자신을 위해서만 이기적으로 사용한다면 살인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치료법을 알고서 그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영혼에 대한 살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부터 오는 빛을 받아 불이 켜질지 모를 어두운 사람들에게, 생명의 등이 되기를 거부해야 되겠습니까!
(4) 이 세대의 인류는 오직 이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만 구조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의무는 다른 이들에게 전가될 수 없습니다
(5) 우리는 주님의 큰 분부에 대해서(마 28:19~20) 어떻게 했느냐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혼들의 얼룩진 피의 옷을 입고 주께로 가겠습니까?
(6)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누구나가 구주의 면류관에 박힐 수 있는 잠재적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상의 사실들을 바로, 그리고 용감히 대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生)의 항해에서 진로를 벗어남을 면할 수 없습니다.
3. 자신
마지막으로, 우리의 생의 계획은 우리의 최선의 이익을 목표로 짜여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이것은 대단히 이기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최선의 것을 가지도록 원하시며, 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계획하신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살기를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현생과 내생에 대해서 나의 최선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다음의 사실들을 깊이 생각해 볼 것입니다.
(1) 그대의 영혼은 구원받을지라도 그대의 삶은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2) 현생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영원에 대한 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일생의 기간은 통치의 기간을 위한 훈련 기간입니다.
(3) 그대는 그대가 죽은 후에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지금 그대의 생활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F. W. 보엄헴은 말하기를 사람이 자신의 무덤에 누워 있을 때 할 수 있도록 어떤 정직한 일을 준비해 두는 것은 각 사람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4) 어느 날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입니다. 그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오직 하나님을 위해 산 생애만 보람 있는 것이 될 것입니다.
(5) 그날에 빈 손으로 서게 되는 두려운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야 한단 말인가
빈 손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나의 사랑하는 구주를 이렇게 뵈온단 말인가
한 날도 주님께 드려 보지 못하고
상품 하나 주님 발 앞에 드려보지 못하고
가야 한단 말인가
빈 손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나의 구주를 이와 같이 뵈어야 한단 말인가
한 영혼도 주님께 인사시키지 못하고
빈 손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 C.C. 루터 -
(6) 주님의 "잘하였도다."란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을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구도자가 지나가고 있을 때 다른 쪽 길에서 자기 일을 하다가 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손실 외에도 손실이라면 얼마나 저울의 먼지 같이 보일까요! 해가 지고 모든 것이 저녁 불빛 속에 선명히 나타날 때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길에 서셔서 누군가가 그 영혼에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할 사람을 찾고 계셨는데 우리가 거기에 없었다면 그 후회가 어떠하겠습니까!
잠시만 생각해 봐도 이 세상에 있어서나 영원에 있어서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을 때가 우리 자신에게 최선의 이익이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의 포부를 시험해 보고 스스로에게 다음의 사항에 대해서 물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나의 포부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의무를 인정하는가?
(2) 나의 포부는 인류에 대한 나의 빚을 이행하는가?
(3) 나의 포부는 나에게 이 세상에서와 하늘나라에서 최대의 보상을 가져다주는가?
만일 나의 포부가 이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가치 없는 야심입니다. 그러므로 내어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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